단상/일상 164

두루마리 휴지

10월이 뜯겨지고 이제 2장 남았다. 가벼워져 약한 바람에도 흔들린다. 어느 논객이 시간의 흐름을 두루마리 휴지에 비유했다. 처음 사용할 때는 줄어드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뭉치에 얼마 남지 않으면 확확 주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여든이 훨씬 넘은 선배님에게 “제가 이곳에 온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라고 말하자, “자네 3년과 내 3년이 같겠는가” 하시며 하늘을 한번 쳐다보셨다. 11월은 위령의 달이다. 저승에 간 영혼들을 기억하고 위하는 달이다. 제단 옆에 기억하고 싶은 분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웃는 얼굴도 있고 조금 슬퍼 보이는 얼굴도 있다. 주위 분들과 어울리지 않는 젊은 얼굴도 있다.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는 순간, 겸손해 진다. 웃고 울며 살다 보면 어느새 나도 사진 속의 얼굴이 된다. 누..

단상/일상 2021.11.03

나는 내가 좋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매일 세수하고 화장하듯이… 과연 그럴까? 갱생의 노력을 포기한 사람들의 심리를 잘 나타내는 말, ‘나는 이미 금간 몸’ 이미 금 갔으니 제돈 주고 살 사람 없고 본인으로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반성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길을 찾아 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 바탕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기가 자신에게 좌절하고 포기하면 그 누구도 도울 수 없다. ‘내 생각이 나를 만든다’ 나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소중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을 한다. 반대로, 내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단정 지으면 나는 나쁜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아끼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돌보는 행동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중한 고려청자 다루는 마음..

단상/일상 2021.11.02

내 보물 만들기

요즘은 잘 안보이지만 예전에는 집집마다 문패가 있었다. 주소는 조그맣게 써 있거나 아예 없고 대신에 집 주인 이름 석자는 크게 씌어 있다. 새로 발견한 동식물, 별, 호수의 이름도 그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모두 나의 소유권을 표시하는 의미다. 나는 나만의 해변을 갖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집값이 한국 돈으로 얼추 10억 가까이 되니 그냥 꿈일 뿐이다. 근자에 트레킹을 하다가 인상 깊은 장소를 만나면 나름대로 내게 익숙한 이름을 붙여보곤 한다. 모래와 짧은 풀이 이어져 있는 한적한 장소는 ‘쿠바 해변’, 무너진 다리는 ‘콰이강의 다리’, 아담한 꽃 길은 내 이름을 딴 ‘아무개 정원’. 이런 식이다. 그렇게 이름을 붙여 놓고 보니, 일단 기억하기도 쉽고 더 친근감이 간다. 농..

단상/일상 2021.11.01

쉬어가는 것

Thanksgiving Day도 지나고 이제 곧 눈발이 날릴 것 같으니 골프장도 하나둘씩 문을 닫고 필드는 깊은 눈 속에 묻혀 겨울을 날 것이다. 이민 와서 지인의 권유로 집 가까운 곳 클럽의 멤버가 되어 한동안 매우,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골프 쳤던 기억이 난다. 사는 지역이 온난하여 일년내내 라운딩이 가능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골프 자체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형편에 비해 과용한 것이 아까워서 거의 의무감으로 골프장으로 매일 출근한 것 같아 조금 민망하다. 어느 것 한가지에 몰두하는 것 좋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나의 전문 분야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취미 생활만큼은 조금 달리 생각해 본다. 자신의 업으로 삼지 않을 바에야 두루 섭렵도 좋은 방법으로 생각된다. 세상에 좋은 음식이 한가지가 아니듯이 ..

단상/일상 2021.10.25

새벽 루틴(Routine)

잠이 줄어 식구 중 제일 먼저 일어난다. 창문 가린 블라인드 열어 빛 받아드릴 준비한다. 데크(Deck)로 통하는 문 열고 상큼한 공기 한 모금 마신다.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촐싹거리던 다람쥐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 녀석도 내 친구가 되었다. 집 밖에 세워 두었던 차가 제 자리에 있는지 확인한다. 세상이 불안하다. 아니, 내 마음이 불안하다. 아직 불 꺼진 집들이 더 많다. 몇몇 집은 아침 식사 준비하는지 달그락 소리가 난다. 부지런히 사는 모습이 좋다. 돌아서서 내 집을 보니 창문 틈으로 발그스레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따뜻해 보인다. 내 집이 제일 좋다.

단상/일상 2021.10.22

옷이 날개 2

‘부모님 날 낳으시고, 선생님 날 만드시고’ 서울 어느 성형외과 건물벽에 붙어있던 광고라고 한다. 지금 봐도 잘 만든 걸작 광고 문구다. 외모를 잘 꾸미는 것. 좋다. 아름다운 것 싫어하는 사람. 없다. 마음이 중요하다. 역시 맞는 말이다. 어느 뇌 과학자가 말하길, 자신은 생각에 따라 얼굴 모양이 바뀌는 것을 믿는다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수배자 전단 사진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음산해 보인다. 선입견인가? 짝짝이 눈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홀로 지내던 우울한 모습의 소녀가 있었다. 어느 날 마지막 방법으로 얼굴을 예쁘게 성형했다고 가정해 보자. 소녀의 예쁜 얼굴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접근한다. 소녀는 점점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 중 괜찮은 심성을 가진 청년을 발견한다. 둘..

단상/일상 2021.10.11

옷이 날개 1

사자성어를 보면 그것을 만든 이가 무엇을 더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다. 권선징악(勸善懲惡) 선이 악보다 먼저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일체를 강조하지만 임금님이 제일 앞이다. 그렇다면 의식주(衣食住)와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기준인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왜 의(衣)와 신(身)을 제일 앞쪽에 두었을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옷(衣) 보다 먹는 것 식(食)이 더 중요할 것 같고,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외모인 신(身) 보다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判)이 더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의식주와 신언서판의 어순을 보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옷이 중요하고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데 있어서는 풍모가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인간이 살아가면서 외형이 미치는 영향이 내부의 모습에 우..

단상/일상 2021.10.11

달라서 좋고

계절이 여름 끝자락이라 도처에 싱그러움이 더해간다. 구부러진 숲길 양옆에 나무와 플, 꽃이 무성하다. 그 사이로 다람쥐가 들락날락하며 부산을 떤다. 하늘에는 구름이 적당히 여백을 메우고 있다. 그들 가운데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는 교만한 내가 서있다. 내가 보기에 참 좋은 구도다. 잘 알고 지내던 직장 선배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온 세상 사람들이 너와 똑 같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끔찍하겠느냐? 그분이 평소 나의 장점을 자주 칭찬해 주고 또 후배인 내가 본인의 일을 많이 도와주는 것을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 까칠한 후배에게 사회에서 어울려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싶었던 의도로 이해된다. 이전 미국 어느 대통령이 한사코 막아냈던 히스패닉계를 미국에서 다 몰아..

단상/일상 2021.09.24

내 마음 속 가시 2

작은 가시는 살 속에 그냥 두어도 삭거나 굳어 내 몸의 일부가 된다. 어떤 땐 굳은살이 보통 살 보다 더 강해져서 유용할 때도 있다. 그럼 큰 가시는? 빼내지 않으면 상처가 덧나 고생한다. 누구나 마음 속의 가시를 가지고 있다. 크고 작고는 본인 생각이다. 본인이 묻어 두기를 원해서 삭고, 굳을 수 있다면 굳이 주위 사람이 들추지 않는 것이 좋다. 짐짓 잊고 있는 상처를 들쑤시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데 본인은 뺄 때의 고통이 두려워서, 아니면 피가 무서워서 망설이고 있는 경우라면 누군가 용기를 불어넣어 주거나, 본인은 눈감고 있고 다른 이가 확 빼 줄 수도 있다. 자살자의 대부분이 실행 전 자살을 암시하는 무엇인가를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살고자 하는 본..

단상/일상 2021.09.21

내 마음 속 가시 1

어느 집이나 아픈 가시 하나는 있다는 말이 있다. 마냥 행복할 것 같은 가정에도 말 못할 아픈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신이 공평해서 그렇다는 생각을 하면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어디 가정사뿐이랴. 내 마음에도 아픈 가시가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아픈 곳. 드러내기도 힘들고, 잊을 수도 없는, 그냥 안고 가야할 그런 것들. 혹자는 말한다. ‘훌훌 털라고…’ 아니면 종교적 의식인 고해를 방법으로 제시한다. 털 수 있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했겠지. 그러지 못하는 마음 역시 다른 가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면 아프다. 처음에는 빼내려고 했겠지만 아파서, 피가 무서워서 등 어떤 이유로 못 빼내면 그냥 살에 묻혀 삭거나 굳는다. 큰 ..

단상/일상 2021.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