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행복 6

세월이 빨라서 행복하다

뜰에 있는 목련 꽃망울 본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제일 높은 가지 잎사귀는 노란 빛을 띈다. 누군가 흐르는 세월의 속도를 화장실에 걸어 둔 두루마리 휴지에 비유한 것이 생각난다. 처음 휴지 뭉치를 걸어 놓고 사용할 때는 줄어드는 것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두루마리에 휴지가 얼마 남아 있지 않으면 확확 주는 것이 느껴 진다고 했다.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질 때 ‘나는 참 편하게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신임 소위 시절 한여름 땡볕 아래 황톳길을 터벅터벅 걸어 행군하면서 점심 먹을 때가 됐나 하고 시계를 보면 오전 9시쯤 됐던 것 같다. 우리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괴롭거나 지루하지 않은 삶을 산다는 방증이 아닐까? 세상이 뒤숭숭하고 모두 집에 갇혀 있는 ..

단상/행복 2021.09.24

행복했던 순간 4

18년 동안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던 녀석이 있었다. 세상에 나온지 4주만에 엄마 젖도 제대로 못 먹고 가게로 팔려와서 옆구리에 피부병 걸린 채 새 주인 기다리던 녀석. 그냥 두면 죽을 것 같아 덥석 안고 집에 와서야 녀석이 시츄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밥그릇 속에 네발 딛고 서 있을 만큼 작았던 녀석. 건강해지라고 ‘바우’라 이름 지어 줬다. 한 6개월 정성 들여 키웠더니 우리집 보스가 되었다. 서열 1위 바우, 2위 엄마, 3위 형아, 4위 누나 내가 마지막이다. 내가 왜 서열 꼴찌가 되었는지 잘 모른다. 그저 ‘이쁘다’ ‘이쁘다’ 해준 죄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서열이 낮다 보니 보스 눈치 살피고 심기 관리 잘해야 한다. 뒤가 마려운 것 같으면 문을 열어드려야 하고 하루에 몇 번이 됐건 콧구멍이 간지..

단상/행복 2021.09.22

행복했던 순간 3

캐나다로 이민 와서 처음 정착한 B.C주에 있는 작은 도시는 마치 고향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물론 낯선 이국 땅에 처음 발붙이고 산 곳이니 그러겠지만, 천당 보다 조금 못한 999당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문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은 곳이어서 더욱 정이 가는 곳이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이민 초기의 어려움을 많이 어루만져준 한 local 성당은 마치 고향 부모님 집과 같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아내를 따라 운전 기사로 성당을 다닌지 거의 8년 만에 세례를 받았다. 청강생 보다는 정식 졸업장을 받아 두는 것이 나중에 뵐지도 모르는 그분을 만날 때 더 유리할 것이라는 세속적인 계산이 마음속 저 밑바닥에 깔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정식으로 성당 재적 학생이 되고난후 나름 열심히..

단상/행복 2021.09.11

행복했던 순간 2

방학이 시작되는 날 늦은 오후다. 겨울 방학은 길다. 1달 넘게 수업 안 받아도 되고 매일 숙제 걱정도 없다. 참 편하고 기쁘다. 눈발이 가끔씩 날리지만 찬 바람은 대부분 문풍지가 막아주니 온돌방이 따듯하다. 아랫목에 깔아 놓은 캐시밀론 이불속에 드러누워 무협지를 읽는다. 무협지는 참 재밌다. 하늘을 나는 주인공은 잘 죽지도 않는다. 그러나 악당은 결국 죽고 만다. 엄마는 무엇이라도 읽으면 좋다고 내가 무협지 읽는 것을 별로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간식거리로 튀긴 강냉이를 넣어 주셨다. 집이 조용하다. 스르르 잠이 온다. 뜰에 있던 내 강아지가 심심한지 몇 번 짖다 멈춘다. 방학 첫날, 재미있는 읽을 거리, 맛있는 간식, 친구 강아지와 함께 있으니 난 참 행복하다. 초등 학교 2~3학년 때 내가 적은 일..

단상/행복 2021.09.11

행복의 조건

행복하고 싶은가? 그러면 행복하다고 생각해라. 우문 현답 같지만 정답이다. 행복은 정신적 영역의 문제지 물질적 영역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주위 환경이 행복하기 때문에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고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위 환경이 행복한 것으로 보인다. 행복은 감정이다. 햄버거 한조각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수 성찬을 앞에 두고도 불만족해 하는 사람도 많다. 같은 교통체증에 갇혀 있어도 느긋이 음악을 듣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행복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지 환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의 조건을 외부 환경에서 찾으려고 하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외부 환경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주식 시장을 내..

단상/행복 2021.09.01

♥행복했던 순간 1♥

검은 바다 위로 훤한 보름 달이 떴다. 어두운 물빛에 황금색 달빛이 내려 꽂히니 파도가 눈부신 파편이 되어 내 눈을 시리게 만든다. 실눈을 떠서 위를 쳐다보니 총총한 별들이 구름사이 여백을 장식하고 있다. 험한 바위벽이 병풍이 되고 나는 그 아래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바위 턱에 오도카니 앉아 사방을 둘러본다.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푸르스레한 캐비나이트 불빛이 인간이 만든 유일한 빛이다. 바위를 때리는 파도 소리가 시원하다. 고립 무원의 무인도 갯바위 위에 이제 나는 완벽하게 자연에 둘러 싸여 있다. 일렁이는 물결 아래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순간, 흔들리던 캐비나이트 불빛이 물속으로 쑥 사라진다. 왔구나! 반사적으로 휘~잉 소리가 나도록 릴대를 잡아챈다. 낚싯대 끝이 물속으로 마구 처박힌다. 있었..

단상/행복 2021.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