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 14

2023.4.8(토) 아침 단상

이곳은 오늘이 부활절. 부활을 기리고 기뻐하는 날. 그래서 나라가 쉰다. 하루 더 못 쉬는 것이 아쉬워 월요일도 쉬고. 그런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부활의 의미가 한결 같지는 않다. 달라도 좋은 의미라면 다 아우르는 것이 그분의 뜻인가? 아니면 어느 것은 틀린 것인가? 모르겠다. 어쨌든 봄에, 죽은 듯 보였던 나무에 새싹 트는 모습이 보기 좋다. 부활절 은총 많이 받으십시오.

여운 2023.04.08

오케스트라 지휘자 2

한국 남쪽 단풍은 이제 시작이란다. 내가 사는 이곳은 끝물이다. 뜨는 해 지는 해처럼 도는구나. 인적 드문 산길에는 잎들이 어느새 가지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웠다. 이제 좀 쉬어야지. 싱싱했던 이파리들이 형형색색으로 카펫처럼 바닥에 좌악~ 깔리고, 그 위를 걸으면 조금 미안하기도하고 어찔어찔하다. 마치 밤하늘 총총한 별 고개 들고 쳐다보면 현기증 나듯이. 참 좋네. 그리고 고맙다. 자연의 오케스트라는 누가 지휘하실까?

여운 2022.10.28

위령(慰靈)

11월은 위령(慰靈)의 달. 저승의 영혼들을 기억하고 위하는 달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떠나서 실제 내게 다가오는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떠난 자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진다. 그들이 다져 논 터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어서 죽음에 대한 자각이다. 나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 그들을 위하려고 왔지만 나를 위하는 마음이 앞선다. 가신분에 대한 위령이 아닌 나를 위한 기도가 된다. 자리에서 조금 일찍 일어선다. 좀 겸연쩍다.

여운 2022.10.24

산자에게 바치는 꽃

무덤 앞에 놓은 꽃이 비 맞고 시들며 썩는다. 영혼이라도 즐기실까?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치는 자의 살아 생전 못다한 후회, 자책, 그리움… 산자에게 드리자. 향기 맡고 꽃잎 보며 위로 받을 수 있는 살아 있는 사람. 그 중에서도 소중한 자신. 시드는 생화보다 마음이 만든 꽃이 더 예쁘다. 웃음꽃, 격려화, 사랑초… 주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지천에 꽃이다. 제단 보다는 눈 맞추고 향기 맡을 수 있는 따뜻한 가슴위가 제자리다. 사방에 널린 꽃을 다발로 만들어 지금 살아 숨쉬는 자에게 안기자. 웃음꽃, 격려화, 사랑초… 지천에 꽃이고 사람이다.

여운 2022.09.06

시인을 죽인 한마디 말

하늘이 조금 높아지고 겨드랑이를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 뭉게구름 몇 개가 모여 보고 싶은 얼굴을 만든다 어느 시인이 내게 한 말 가을이 깊어 갈 때 시외버스를 타고 들판을 지나 가는데 옆 좌석 창가에 앉아 밖을 보던 어린아이가 엄마의 팔을 당기며 “엄마, 엄마, 저 들판 참 이쁘지?” 졸던 엄마가 팔을 밀치며 “조용히 해라 손님들 잠 깬다.” 이 광경을 보고 그 시인은 속으로 울었다고 한다. 아, 이렇게 한 천재 시인이 죽어 버렸구나. 우리는 모두 시인의 마음을 갖고 태어난다. 나도 모르게 켜켜이 쌓인 삶의 때가 그 순수함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현실이 고단하다는 이유로 뾰족이 내미는 시인의 싹을 눌러 버리지는 않았는지… 2021년 어느 날 가을의 문지방을 넘는 계절의 모습을 보면서

여운 2021.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