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일상

두루마리 휴지

Chris Jeon 2021. 11. 3. 19:36

 

 

10월이 뜯겨지고 이제 2장 남았다. 가벼워져 약한 바람에도 흔들린다.

 

어느 논객이 시간의 흐름을 두루마리 휴지에 비유했다. 처음 사용할 때는 줄어드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뭉치에 얼마 남지 않으면 확확 주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여든이 훨씬 넘은 선배님에게 “제가 이곳에 온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라고 말하자, “자네 3년과 내 3년이 같겠는가” 하시며 하늘을 한번 쳐다보셨다.

 

11월은 위령의 달이다. 저승에 간 영혼들을 기억하고 위하는 달이다. 제단 옆에 기억하고 싶은 분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웃는 얼굴도 있고 조금 슬퍼 보이는 얼굴도 있다. 주위 분들과 어울리지 않는 젊은 얼굴도 있다.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는 순간,

 

겸손해 진다.

 

웃고 울며 살다 보면 어느새 나도 사진 속의 얼굴이 된다. 누군가 가끔씩 나를 쳐다보며 지금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감사함을 느낀다.

 

내가 저분들이 다져 놓은 땅 위에 서 있다. 자신의 땀에 절은 곳을 누가 디디고 설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살다 가신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좀… 그렇고 그런 느낌이 든다. 긴 숨 내쉬며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옆에 앉은 내 반쪽이 아이들과 통화한다. “가는 길에 너희들이 좋아하는 도넛 사갈까?” ‘좋아요’ 답을 받은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지고 나도 덩달아 좋아진다.

 

무거웠던 마음이 사는 즐거움으로 덮인다. 이래서 인간은 살 수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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