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일상 129

되고 싶은 모습

내가 늙은이라는 생각은 아직 안 든다. 손주가 없으니 할아버지 소리 들을 일 없고, 부모님 잘 둔 덕분에 아직 염색약 신세 안진다. 잘 걷고 심지어 좀 뛰기도 하니 나이가 나랑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틱틱 반말하기도 한다. 얼마전 지역 신문에 5년전 내 사진을 보고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름은 분명 네 이름인데 사진 속 사람이 달라서 긴가민가해서 전화했다고 한다. 아뿔사, 나만 모르게 내 얼굴이 변했다. 나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늙어서 되기 싫은 모습을 가정해 두고 그렇게 안되기 위한 연습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어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할말만 또박또박 정확하게 하며 살고 싶다. 귀 닫고 주절주절 같은 말 반복하는 모습은 싫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단상/일상 2021.11.15

약장수 3: 몰약

‘모르는 것이 약이다’ 대부분 약간의 마취효과나 수면제 효과가 있는 약 정도로 알고 있다. 문제임을 모르니 가만히 있게 돼서 마음이 편하고 불필요한 사단에 말려들지 않는다. 눈 감고 있으니 내 세상이다. 이런 효능 외에 이 약이 갖고 있는 숨은 효능이 대단하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겸손의 시작이다. 내가 알고 있으니 남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고, 나 보다 모르는 자는 내 발아래로 보이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겸손의 반대 끝인 교만 쪽으로 마구 달린다. 모른다고 생각하니 세상 모든 일이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긴다. 알고 계시는 분들이 대단해 보인다. 배움이 즐겁고 커가는 내가 대견스럽다. 교만에서 뒤돌아 반대 끝 겸손 쪽으로 내려온다. 편견과 고집이 사라진다.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시원하다. 창고..

단상/일상 2021.11.13

약장수 2: 체하는 약

“조석(朝夕. 아침 저녁 밥)은 굶고도 이는 쑤신다” 굶고도 먹은 체하거나 없으면서도 있는 체하며 허세를 부리는 꼴을 비꼬는 말이다. ‘~인체’ 하는 것은 통상 나쁜 행동으로 치부된다. 독약도 잘 쓰면 명약이 될 수도 있는 법. ‘~인체 하는 약’의 효능이 굉장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주위 환경이 행복하기 때문에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고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 ‘내가 행복한체 하는 것’ 말장난 같이 들리기도 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리 있는 말이다. ‘내가 두렵지 않은 체할 때와 내가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일 때의 상대방 반응이 달라진다. 내가 착한 체하면 나쁜 일 하기가 어려워진다. ‘~인체’하는 것을 단지 허세라고만 생각하지..

단상/일상 2021.11.13

약장수 1: 만약

영어 배울 때 가정법 문법이 제일 헷갈렸다. 한국말의 가정법은 상대적으로 쉽다. 시제와 관련 없이 ‘만약’만 붙이면 대충 뜻이 통한다. 그런데 이 ‘만약’의 효능이 대단하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효과가 탁월하다. "만약 내가 빛의 속도로 날아가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만약 내가 그였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창조적인 사람이 되고,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이 약을 상용화하면 큰 돈 벌 것 같다. 약장수가 되기로 한다. “신묘한 약이 왔어요. 창의력을 높여주고 사람과의 갈등을 없애 주는 신기한 약. 아이도 오고 어른들도 와서 먹어 봐요.” 관심 있으신 분은 이 ‘만약’의 효능을 시험하는 임상 테스트에 참여해 주시기 바란다.

단상/일상 2021.11.13

두루마리 휴지

10월이 뜯겨지고 이제 2장 남았다. 가벼워져 약한 바람에도 흔들린다. 어느 논객이 시간의 흐름을 두루마리 휴지에 비유했다. 처음 사용할 때는 줄어드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뭉치에 얼마 남지 않으면 확확 주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여든이 훨씬 넘은 선배님에게 “제가 이곳에 온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라고 말하자, “자네 3년과 내 3년이 같겠는가” 하시며 하늘을 한번 쳐다보셨다. 11월은 위령의 달이다. 저승에 간 영혼들을 기억하고 위하는 달이다. 제단 옆에 기억하고 싶은 분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웃는 얼굴도 있고 조금 슬퍼 보이는 얼굴도 있다. 주위 분들과 어울리지 않는 젊은 얼굴도 있다.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는 순간, 겸손해 진다. 웃고 울며 살다 보면 어느새 나도 사진 속의 얼굴이 된다. 누..

단상/일상 2021.11.03

나는 내가 좋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매일 세수하고 화장하듯이… 과연 그럴까? 갱생의 노력을 포기한 사람들의 심리를 잘 나타내는 말, ‘나는 이미 금간 몸’ 이미 금 갔으니 제돈 주고 살 사람 없고 본인으로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반성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길을 찾아 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 바탕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기가 자신에게 좌절하고 포기하면 그 누구도 도울 수 없다. ‘내 생각이 나를 만든다’ 나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소중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을 한다. 반대로, 내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단정 지으면 나는 나쁜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아끼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돌보는 행동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중한 고려청자 다루는 마음..

단상/일상 2021.11.02

내 보물 만들기

요즘은 잘 안보이지만 예전에는 집집마다 문패가 있었다. 주소는 조그맣게 써 있거나 아예 없고 대신에 집 주인 이름 석자는 크게 씌어 있다. 새로 발견한 동식물, 별, 호수의 이름도 그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모두 나의 소유권을 표시하는 의미다. 나는 나만의 해변을 갖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집값이 한국 돈으로 얼추 10억 가까이 되니 그냥 꿈일 뿐이다. 근자에 트레킹을 하다가 인상 깊은 장소를 만나면 나름대로 내게 익숙한 이름을 붙여보곤 한다. 모래와 짧은 풀이 이어져 있는 한적한 장소는 ‘쿠바 해변’, 무너진 다리는 ‘콰이강의 다리’, 아담한 꽃 길은 내 이름을 딴 ‘아무개 정원’. 이런 식이다. 그렇게 이름을 붙여 놓고 보니, 일단 기억하기도 쉽고 더 친근감이 간다. 농..

단상/일상 2021.11.01

쉬어가는 것

Thanksgiving Day도 지나고 이제 곧 눈발이 날릴 것 같으니 골프장도 하나둘씩 문을 닫고 필드는 깊은 눈 속에 묻혀 겨울을 날 것이다. 이민 와서 지인의 권유로 집 가까운 곳 클럽의 멤버가 되어 한동안 매우,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골프 쳤던 기억이 난다. 사는 지역이 온난하여 일년내내 라운딩이 가능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골프 자체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형편에 비해 과용한 것이 아까워서 거의 의무감으로 골프장으로 매일 출근한 것 같아 조금 민망하다. 어느 것 한가지에 몰두하는 것 좋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나의 전문 분야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취미 생활만큼은 조금 달리 생각해 본다. 자신의 업으로 삼지 않을 바에야 두루 섭렵도 좋은 방법으로 생각된다. 세상에 좋은 음식이 한가지가 아니듯이 ..

단상/일상 2021.10.25

새벽 루틴(Routine)

잠이 줄어 식구 중 제일 먼저 일어난다. 창문 가린 블라인드 열어 빛 받아드릴 준비한다. 데크(Deck)로 통하는 문 열고 상큼한 공기 한 모금 마신다.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촐싹거리던 다람쥐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 녀석도 내 친구가 되었다. 집 밖에 세워 두었던 차가 제 자리에 있는지 확인한다. 세상이 불안하다. 아니, 내 마음이 불안하다. 아직 불 꺼진 집들이 더 많다. 몇몇 집은 아침 식사 준비하는지 달그락 소리가 난다. 부지런히 사는 모습이 좋다. 돌아서서 내 집을 보니 창문 틈으로 발그스레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따뜻해 보인다. 내 집이 제일 좋다.

단상/일상 2021.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