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행복

행복했던 순간 4

Chris Jeon 2021. 9. 22. 01:26

 

18년 동안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던 녀석이 있었다.

세상에 나온지 4주만에

엄마 젖도 제대로 못 먹고 가게로 팔려와서

옆구리에 피부병 걸린 채 새 주인 기다리던 녀석.

 

그냥 두면 죽을 것 같아 덥석 안고

집에 와서야 녀석이 시츄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밥그릇 속에 네발 딛고 서 있을 만큼 작았던 녀석.

건강해지라고 바우라 이름 지어 줬다.

 

6개월 정성 들여 키웠더니 우리집 보스가 되었다.

서열 1위 바우, 2위 엄마, 3위 형아, 4위 누나

내가 마지막이다.

내가 왜 서열 꼴찌가 되었는지 잘 모른다.

그저 이쁘다’ ‘이쁘다해준 죄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서열이 낮다 보니 보스 눈치 살피고 심기 관리 잘해야 한다.

뒤가 마려운 것 같으면 문을 열어드려야 하고

하루에 몇 번이 됐건 콧구멍이 간지러우신 것 같으면

냉큼 목줄을 대령하고 따라 나서야 한다.

하루 평균 10km 정도 모시고 다녔다.

 

봄날 햇살이 따뜻한 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숲속길로 나를 끌고 간다.

왕복 약 8km 정도 되는 거리다.

녀석은 왕복길이라는 개념이 없다.

무조건 가고 싶은 만큼 가고 피곤하면

내 품에 안겨서 온다.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어 생긴 버릇이다.

 

가는 길에 들꽃이 예쁘게 피었다.

몇 개 꺾어 목줄에 달아 준다.

흰색 바탕에 기름이 반질거리는 까망색 겉옷을 입은 모습에

빨강, 노랑 들꽃으로 장식한 폼이 귀여운지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이 모두 웃으며

‘How old is she?” 라고 묻는다.

사실 그는 사내아이다.

 

돌아올 반환점에 이르자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내 무릎을 잡고 올라오고 싶어 한다.

이제 안고 가라는 지시다.

안아 품었더니 따뜻하고 보드랍다.

온몸의 힘을 빼고 안겨 있으니 녀석과 나 사이 빈틈이 없다

꼭 찹쌀떡 한덩어리 안고 있는 느낌이다.

 

나도 조금 졸리는 오후

하늘은 맑고 바람은 따뜻하다.

품속의 녀석이 옹알이 한다.

살며시 얼굴 덮은 귀를 들춰보니 깊은 잠에 빠졌다.

가볍게 엉덩이 때려주고

자장가 흥얼거리며 숲속길 걸으니

바우 냄새와 꽃내음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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