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설

추수

Chris Jeon 2021. 9. 10. 11:01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곡식이 익으면 추수를 한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고, 가뭄이 들 때면 등짝이 타는 듯한 땡볕 아래 물을 주는 것은 농부의 일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곡식이 익어가는 대부분의 과정은 하늘이 하는 일이다.

 

 그 누가 뿌리로부터 볍씨까지 영양분을 나를 수 있으며 알곡이 적당히 익도록 만들 수 있을까? 모든 것은 하늘이 주관하고 인간은 거저 하늘이 주신 잔심부름만 할 뿐이다.

 

 때가 되면 알곡은 거둬진다. 밑동이 잘리고 볍씨가 털려 가마니에 모아지고 배고픈 인간들의 입속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산다. 잘려진 몸통은 볏단이 되어 지붕이 되고 지푸라기는 거름이 된다. 볍씨 중 실한 놈은 내년을 위한 종자로 선택되어 창고에 갈무리된다.

 

 한 알의 볍씨에서 출발해서 모가 되고, 커서 벼가 된 입장에서 보면 내 몸이 갈갈이 찢어지고 털리고 익히고 씹혀진 것이지만 이는 자연의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순환이다.

 

 내년에도 어김없이 창고에 갈무리되었던 종자는 파종 되고 가을이면 다시 수확되어서 어떤 이의 몸 일부분이 될 것이고 나머지 역시 조만간 이 세상 어느 한부분이 될 것이다. 벼의 모습은 없어졌지만 벼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누군가 사도신경 육신의 부활이 어색하게 들리면 가을철 수확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라고 했다.

 

2020.4월 어느날

조선일보 백승호기자의 부활에 대한 기사를 읽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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