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설

곰곰이 생각하며 읽기

Chris Jeon 2021. 9. 3. 03:34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고 아브라함은 이에 순종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를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믿음의 모델로 삼고, 하느님이 그의 믿음을 확인 후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셨다며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찬양한다.

 

 나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왜 정작 본인은 인간을 시험하는가? 남이 내게 하는 싫은 짓은 나도 남에게 하지 말하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면, “시험역시 그 분으로서는 하지 말아야할 것 중 하나다.

 

 성경의 내용을 한단어로 축약하면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인륜을 거슬러는 친자살해를 믿음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셨다면,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인간의 상식적 논란에 비추어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굳이 시험하실 것이면 사랑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방법을 무수히 발견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 일은 머리카락 하나 같은 일이라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굳이 이해가지 않는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험해야 인간의 믿음을 아시는 분이라면 믿습니다를 연발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믿음을 그때마다 시험하실 것인가?

 

 성경을 문자로만 읽을 때 마주치는 의문들 중 하나다. 그래서 혹자는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더라도 결국 하느님께서 살려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집착을 버리라는 메세지다.”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지극히 사랑하는 분에게 바치는 지극한 사랑의 완성등등. 내게는 아전인수격의 해석이거나 평범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거나 아니면 형체를 알 없는 모호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Story telling”이라는 용어가 있다. 홍길동전을 그 이야기가 의도하고 있는 기본 사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홍길동전의 저자가 홍길동의 무용담,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책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친자와 서자를 차별하고 있는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집필하였음을 알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구한 세월 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오다가 여러 언어와 집필가를 거쳐 전해온 성경도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가 존재했던 아브라함 시절에 그와 같은 악습을 타파하고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강조했던 그분에 대한 존경과 찬양의 내용이, 맏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이에 대한 순응, 그리고 종결부에 하느님께서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크나큰 은총을 내리셨다는 해피앤딩으로 끝을 맺은 이야기 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은 글자 하나 토씨 하나 고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문자에 얽매이면서도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해석하는 것,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메시지로 해석하는 것 모두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의 가르침으로 믿고,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상식선에서 곰곰이 생각하면,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가르침의 윤곽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2021.07.29

아브라함의 사례를 믿음의 모델로 역설하는 강론을 듣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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