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일상

겨울철 A/S

Chris Jeon 2023. 2. 1. 01:56

걸작품인 것은 맞지만 24시간 움직이는 물건이니 인간도 A/S가 필요하다.

제조처가 신비로 가려진 곳이어서 직접 찾아가기는 힘들고 대신 세상에 의사란 분이 계셔서 몸은 돈만 주면 고칠 수 있지만 정신은 좀 뭣해서 대부분 내가 직접 수리한다.

 

며칠사이 눈이 많이 왔다. 삐까뻔쩍과는 거리가 먼 시골스러운 나라지만 조용하고 공기가 깨끗해서 나 같은 촌놈이 살기 괜찮은 곳이다.

 

집에서 30KM 거리에 내가 좋아하는 Trail이 있다. 왕복 10KM 거리의 계곡을 끼고 가는 산길. 내 옆 힘쎈분과 둘이서만 가면 혹시 서열 다툼 할 수도 있으니 중재자 역할 할 지인 부부를 같이 가자고 꼬드김.

 

 

  

3시간 정도 걷는 동안 한국인 그룹 4명 만난 것이 전부다. 예상대로 한적하다. 다행인 것은 누가 먼저 걸어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관리 사무소에서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주 경로를 따라 폭 40cm 정도로 눈이 조금 다져진 path가 나 있어 부츠가 깊이 빠지지 않고 뽀득뽀득 소리 내면서 걷기 딱 좋다.

 

 

  

최근 날씨가 그다지 혹한이 아니어서인지 아래로 보이는 계곡물은 완전히 얼지 않았다. 살던 수달이 지은 댐은 그사이 허물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 깊은 땅속에서 겨울을 나는 모양이다. 내년 봄 다시 보게 되겠지. 새끼도 같이 나왔으면 좋겠다.

 

 

  

가까이서 보니 수량이 꽤 늘었다. 완전히 얼면 건너편에 있는 나만의 아지트로 갈 수도 있는데… 가을에 바지 걷고 개울 건너가서 솔밭사이 깔개 깔고 하늘 보고 큰 대자로 누우면 얼굴 위로 형형 색색 단풍이 떨어진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 푸른 하늘과 숲만이 내 친구다. 올 가을에도 그렇게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영화의 한 장면 흉내내 본다. 수북이 쌓인 눈 위에 벌렁 누워 보니 생각보다 안 차다. 오히려 이불 위에 누운 것 같이 포근하다. 얼굴에 낙엽 대신 눈꽃이 내린다.

  

주차장에 돌아와서 집에서 타 갖고 온 커피를 서서 나눠 마신다. 블랙커피여서 달달한 쿠키가 더 맛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유튜브가 선정해준 좋아하는 팝송을 메들리로 듣는다. 정신이 맑아지면서 편하다.

 

A/S는 아주 성공적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만큼은 A/S, Always Smile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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