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일상

미치다

Chris Jeon 2023. 1. 29. 20:24

 

 

서양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 중 하나가 표정 연출이 참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참 심각한 이야기 하다가 사진 찍는다 싶으면 찰나에 입을 옆으로 쫙 찢고 활짝 웃는 모습이 나온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잘 안된다. 그래서 사진 찍을 때 쓰는 보조적 방법 중 하나가 ‘치즈’라고 외치는 것. “치즈”하면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가니까. 그런데 더 걸작을 봤다. ‘미친년’이다. “미친년” 하면 안 웃고는 못 배긴다.

 

문득 미쳤다고 하는 것이 과연 나쁜 것이기만 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씩 미치고 싶다고도 하니까. 그럼 좋은 미침을 가려내기 위해 부정적 미침부터 잘라내 보자.

 

일단 자발적 미침과 비자발적 미침부터 구분한다. 비자발적 미침은 문자 그대로 질병이나 사고와 같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내가 당한 것이니 좋다고 볼 수 없다.

 

그 다음 법에 저촉되는 미침은 안된다. 화 난다고 총 빵빵 쏘는 미침 안되지. 요즘 세상이 얽혀 있어서 한사람이 잘못 미치면 전세계가 시끄럽다. “푸” 모씨의 예.

 

마지막으로 미침과 중독의 개념을 구분한다. 노름에 미치거나 술에 미치거나 색에 중독되는 것. 이것은 질병이나 본인 의지가 약해서 습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미침과는 다르다.

 

자발적이고 법에 저촉되지 않고 중독이 아닌 미침만을 생각해 보니 슬며시 기분이 좋아지면서 웃음이 난다.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앞에 서 있는 상상. 좋아 하는 음악을 내 마음 대로 연출하는 열정적인 지휘자의 모습, 며칠 밤을 새며 완성한 내 그림을 보면서 맡는 새벽 블랙 커피 향. 참 어렵지만 꼭 이루어 내겠다는 의지 하나로 수십년 버텨온 끝에 마침내 짠~ 이루고 만세 부를 때.

 

가끔씩 나도 한번 미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보고 ‘미친놈’ 하는 소리 못들어 봤다. 나는 지극히 정상인, 보통 사람인 모양이다. 세상은 보통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뭔가 아쉽다.

 

그래서 내가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혹시 지금이라도 미칠 수 있을까 해서.

 

첫째, 유전적 요인이다. 성격은 많은 부분이 유전적 요인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어쩔 수 없는 요소.

 

둘째, 내가 용기 부족하고 조금 게으르고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탓이다. 유전적 요인과도 관련 있겠지만 내가 형성해온 태도 문제이기도 하니 내 탓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내가 선택해온 방식이니 그럴 필요도 있었겠지… 라고 자위할 수도 있겠다.

 

셋째, 지금까지 미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글쎄~ 내가 안본 것이겠지.

 

사람의 내일 일은 모르지만, 앞으로도 내가 크게 미칠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미친다는 것이 꼭 바람직하거나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 세상 사람 다 미치면 무서운 세상 될 것이니까.

 

대신 지금보다는 내가 좋아 하는 부분에서, 조금만 더 미쳐보려고 노력 것이 삶의 활력이 될 것 같다. 자발적으로, 법에 저촉되지 않고, 중독이 아닌, 지금껏 형성해온 관계 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미쳐보는 것…

 

PS) 사진 찍을 때 친하지 않은 그룹 앞에 두고 ‘미친년’ 하면 화 낼 사람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그럴 때는 직접 느낌이 와닿지 않는 영어로 번역해서, “crazy year” 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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