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설

의심하지 말지어라

Chris Jeon 2024. 10. 26. 11:05

 

 

 

서로 부대끼며 살다 보면 의심할 경우 있다.

웃으며 다가 오지만 속에는 칼을 품고 있을 수도 있고

좋은 말씀이라며 열변을 토하지만 그 진의가 좀 찜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인간은 부정적 사고로 편향((negativity bias) 되어 진화되었다고 말하는 진화론자도 있다.

잘 모르는 상황이 발생되면 위험할 것이라고 우선 예측하는 개체가 더 많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다.

 

내게 들어오는 무수한 정보를 내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이럴 경우에는 의문이 들고 이를 질문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순서다.

 

여기에서 하나 구분이 필요한 것이 의심과 의문의 개념 차이다.

‘의심은 불신(不信)의 마음이 바탕에 깔린 질문이고, 의문은 완전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만들어낸 질문이다.’ 라는 인용구가 나의 이해를 돕는다.

의문과 질문은 나의 이해를 높이고 이는 곧 나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된다.

 

내게 주어지는 정보 중에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가진 것이라고 다수가 인정하는 정보일 경우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의심하지 말지어라.”

 

2000년전 그분을 모시고 다니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열두명의 제자들도 그분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2000년 후의 사람들은 깨알처럼 수많은 문자로 이루어진 글을 읽고 그분의 뜻을 짐작한다.

3년 동안 숙식을 같이하며 가르침을 받은 열두명의 제자들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질책도 받았는데 하물며 2000년이란 시공간을 뛰어넘은 현대인들이 문자로써만 전해지는 가르침에 대해 의문과 질문이 없을 수가 있을까?

 

그분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하지 않지만 그분의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려는 욕구가 만들어낸 의문과 질문은 곧바로 ‘맹신’과 ‘올바른 믿음’을 가르는 도구가 된다.

 

여럿이 모여 성경을 읽는다.

읽고 나서 묵상한다. 이후 그 묵상의 내용을 나눈다.

“저는 이러이러한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의심하지 마시고 믿음을 가지세요.”

“의심이 아니라 의문이고 질문입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요.”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주님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말하고 나니 방법이 마땅치 않다.

“기도로 질문하면 답을 주실까?”

“혹시 그 답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아니, 성령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던데…”

 

또다시 의문과 질문이 이어진다.

가만히 있었으면 머리가 편할 텐데 괜스레 또 일 만들었다.

 

PS) 그동안 의심과 의문이란 주제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하면서 조금 실감나도록 가상의 대화 장면을 삽입했습니다. 픽션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요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37) 2023.12.26
약속글 4: 기도에 대한 생각  (25) 2023.01.17
자식과 로봇  (0) 2023.01.07
되바라진 자식의 항변  (0) 2023.01.06
내가 신부님이 된다면  (21) 2022.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