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일상

타타타

Chris Jeon 2021. 8. 30. 07:32

  갑자기 ‘타타타’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김희갑 선생님이 작곡하고 가수 김국환씨가 부른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하며 핫핫핫 웃는 가사가 인상적인 노래의 제목이다. 브리트니 백과사전을 책장에 장식용으로 꽂아 두고 흐뭇해 하던 시대가 있었는데, 이제는 손으로 몇 자 치기도 번거로워서 “Hey Google”하고 불러 “타타타의 뜻?”하고 묻자 내가 궁금했던 답을 주르르 나열해 준다. 산스크리트어로 ‘그래 그거야’라고 번역되기도 하며, 내면의 뜻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 진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정보가 필요할 때 입만 움직이면 즉각 그럴듯한 정보들이 내 눈앞에 나열되는 참 편한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중 내가 가장 맞다고 믿는 것을 선택해야하는 부담은 있지만… 그러다 보니 ‘귀명창’이라는 다소 시니컬(cynical)한 신조어도 등장 하나보다. 입이 명창이 되어야 하는데 귀가 명창이 되는 기현상.

 

 여기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느낀다. 온갖 정보가 정보로만 내 머리에 쌓인다면 그것들이 컴퓨터에서 협소한 내 머리로 위치 이동한 것이라는 의미 밖에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무한대 용량을 가진 컴퓨터에 두고 필요할 때 마다 꺼내 쓰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모아진 정보를 소화해서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이치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정보 획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해외 토픽에서 까치가 자기를 돌봐준 개를 어미처럼 따르고 멍멍 짖기까지 한다는 내용을 보았다. 개가 죽어 가는 까치 새끼를 돌봐 주었더니 회복된 까치가 개를 제 어미로 알고 따르고 개는 그런 까치를 제 새끼로 여기고 젖도 준다는 것이다. 단순히 동물의 본능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르다고 한다. 고도의 사고 능력이 있어 설사 어느 동물이 자기를 돌봐 주었더라도 진짜 부모가 아님을 알 수 있어 그 개와 까치 같은 관계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고도로 사고 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인간이 더 똑똑하게 사고할 수 있어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주장하는 자의 정의에 대한 정의도 제 입맛에 따라 달라서 정의를 외치는 사람끼리 아웅다웅하는 세상의 모습에서 어차피 인간의 제한된 사고의 폭과 깊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을바에야 차라리 개와 까치처럼 사는 것이 더 선한 삶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자조가 든다.  귀명창만 늘어나서 시끄러운 세상보다 나를 죽음에서 구해준 이를 어미로 믿고, 나를 따르는 자를 자식으로 여기는 단순하지만 변함없는 믿음이 있는 세상이 가끔은 더 나아 보인다.

 

2021.06.26

정의란 구호가 난무하는 세상이 실제로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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