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돌봄 단체에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장애인'과 ‘정상인’이 아니라,
‘장애인’과 ‘잠재적 장애인’으로 나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미 있는 구분이다.
내가 언제 사고 당할지 모른다. 사고 안 당하더라도 치매가 기다리고 있다.
요행히 요리조리 다 피한다 하더라도 뇌의 자연 노화에 따른 ‘어리버리’는 어찌 할꼬.
오늘 ‘발달장애인 부모 후원 음악회’를 다녀왔다. 장애 가진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한인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2부에 장애인들도 참여하여 무대를 꾸몄다.
행사를 기획하고 지휘까지 맡으신 목사님의 열정을 보니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정상인도 힘들 텐데 장애가진 어린 학생들을 가르쳐서 무대에 서도록 지도한다는 것은 특별한 소명 의식 아니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서 있기도 불편한 학생들이 소프라노 독창도 하고 트럼펫도 분다. 사실 나도 테너 색소폰 좀 연습하다가 그만 뒀다. 지루하고 힘들어서…
잠재적 장애인인 내가 실제 장애인이 된다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원망하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체념하며 살지도 모른다.
뜻을 세우고 서로 도우니 장애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이 보인다.
세상 돌아가는 것 요지경이라고 욕만 했는데, 요지경이 아닌 장관을 봤다.
세상은 참 알다 가도 모르겠다.
아니, 내 눈이 어둡고 소견이 좁았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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