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반성

오랜만의 라운딩

Chris Jeon 2021. 9. 11. 00:33

 

 골프는 참 좋은 운동이다. 돈과 시간이 좀 많이 든다 싶어 그렇지 70이 넘어도 age shooter를 노려볼 수 있는 운동이라서 더 매력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필드에 나갔다. 후배분들이 고맙게도 초청해준 덕이다. 약속일 전 평생 잔소리꾼인 아내가 조언을 준다. 옛날 생각 잊어버리시고 마음 편히 즐기다 오세요. 맞은 말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티 박스에 서니 약간 현기증이 난다.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나무와 풀들도 나를 지켜보는 것 같다. 순간 몸이 뻣뻣해지고 드라이버의 바람 가르는 소리에 비해서 공은 초라하게 러프로 힘없이 휘어져간다.

 

 세컨드 샷 거리가 많이 남았다. 조금이라도 더 가야지 하는 마음에 평소 잘 안 썼던 3번 우드를 잡는다. 공이 놓인 곳이 풀이 긴 러프임을 깨닫지 못한다. 죽을 힘을 다해 쳤더니 공이 아닌 애꿎은 땅을 때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공은 러프를 벗어나서 100 야드쯤 굴러간 후 페어웨이에서 나를 조신하게 기다린다.

 

 이쯤 되어서야 조금 정신을 차린다. 남은 거리에 관계없이 이전에 내가 자신 있었던 아이언을 뽑아 들고 그린 앞쪽으로만 가달라는 심정으로 툭 치니 맑고 가벼운 소리가 나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멀리 날아가서 그린 조금 못 미친 지점에 떨어진다.

 

 그러면 그렇지 옛날 실력 어디 가나?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서 그린을 쳐다보니 30야드쯤 남았다. 이정도 거리에서 핀에 붙이는 것이 내 특기였지. 공이 홀에 바로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OK’ 소리가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공이 핀에 붙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칩샷을 한다.

 

 샷을 한 후, 아니다 샷을 하면서 그린을 보니 공이 보이지 않는다. 아뿔사, 공이 머리를 맞고 깜짝 놀라 몇 번 구른 뒤 바로 앞 잔디 속에 머리를 쳐박고 떨고 있다. 공을 보지 않고 공이 핀에 붙는 장관을 기대하며 그린을 먼저 본 탓이다.

 

 후배님들 앞에서 인상 쓸 수는 없어 웃음을 잃지 않고 퍼팅을 했으나, 사실 퍼팅인들 제대로 됐겠는가? 어차피 트리플 보기 이상인데 하는 심정으로 툭툭치니 공이 홀 좌우를 왔다 갔다 했다.

 

 홀 아웃을 하고 다음 홀로 가는 동안 푸른 하늘을 쳐다본다. 내가 조금 부끄럽다. 매일 죽기 살기로 연습하는 프로들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는 것이 골프인데, 10년 가까이 연습하지 않은 내가 그림 같은 샷을 기대했다. 말로는 마음을 비워야지 하면서도 속으로는 열심히 할 때 몇 번 해본, 그것도 우연일 수도 있는 싱글의 추억이 현실인양 착각하는 모습이 가소롭다.

 

 욕심 ->고통 ->반성의 사이클을 18홀 내내 반복하면서 라운딩을 끝내고 나니 조금 피곤해졌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묻는다. “라운딩 어땠어요?” 큰소리로 시원하게 대답한다. “참 좋았어. 많이 느꼈지!” 진심이다. 하지만 다음에 다시 라운딩할 기회가 있다면 내 생각과 몸이 과연 일치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여전히 들지 않는다.

 

2021 9

후배님들과 오랜만의 라운딩을 마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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