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글자 한 자 토씨 하나 고칠 수(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고대어로부터 현대어까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온 성경이 그 원전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없고 또한 번역 과정상의 오류는 없다 할지라도 시대적 배경이 다르고 과학의 발전 수준이 달라짐으로 인한 변화는 그 해석상에 반영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그 문자적 해석보다는 의미의 이해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앙고백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불편함으로 남는다. 위대하신 분의 탄생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한 story telling으로 이해하면 동정이란 단어는 의미의 본질을 훼손하지는 않는다고 내 나름대로생각해보지만, 내 입으로 “동정녀”를 외면서 머리까지 조아리는 것은 여전히 편하지 않다. 만약 이 시점에서 그 구절을 바꾼다면 어떨까? 가정해서 교황님이 내 마음과 같아서,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하느님의 지극한 은총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사…”로 바꾼다면. 과연 후손들에게 이러한 수정이 칭찬받을 수 있을까?
현재의 우리는 신의 창조물 시리즈 중 최신판이다. 사는 방법도 그렇고 지식에 있어서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최신판도 구형이 될 것이고 나의 지적인 수준도 그때쯤 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유인원의 수준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겠다. 또 다른 가정이지만, 그때의 과학 수준이 생각 하나로 처녀의 몸에서 아이를 잉태 시 킬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어쩔 것인가? 교만이 죄의 근원이라고 했다. 나의 알량한 인식 수준에 얽매여 큰 숲을 못 보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사실 동정이면 어떻고 사랑의 산물이라면 또 어떠리. 위대하신 분을 잘 키워 내신 훌륭한 분이시라는 데는 모두가 찬성하는 것이니 어쭙잖은 논리로 무장된 이해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 성경의 글자 하나 토씨 하나 고칠 것이 없다 것에 연연해 하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글자나 토씨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0년 5월 11일
동정이란 말에 의문이 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