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일상

구식 재봉틀이 가져온 단상

Chris Jeon 2023. 12. 16. 22:57

 

 

#1

집에 오래된 재봉틀이 있다. 아내의 사랑하는 골동품이자 생활 도구다.

어느 날 작동이 멈췄다. 더 이상 재봉질이 안된다. 수명을 다한 것인가?

“그래 할 만큼 했어.” “이젠 버려도 아깝지 않아.”

아내가 같은 말을 내 앞을 왔다갔다하며 계속 반복한다.

당신이 좀 고쳐보라는 압력으로 느껴진다.

 

불 켜고 자세히 들여다 본다. 실이 박히지 않으니 분명 북실 문제인 것 같다.

북실이 들어 있는 부분의 커버를 떼어내고 들여다보니 부속품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붙잡아 두는 arm이 두개 보인다. 별 생각없이 그 팔 2개를 열어 젖히니, 아뿔싸, 생선 배가르면 내장 튀어 나오듯 각가지 부속품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조립 순서 기억할 새가 없이 벌어진 일이다. 난감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또 염장 지른다.  ”그냥 버리라 했는데 오히려 일 만들었네.” 슬슬 혈압 오르지만 ‘결자해지’라 내가 해결해야 한다. 만든 자도 있는데 그걸 사용 못해서는 안 되지. 요모조모 요리조리 30분을 보고 맞추다 보니 딸깍 소리 나면서 부속품들이 모두 제 자리 잡은 것 같다.

 

긴장의 순간. 아내 불러 북실 넣고 돌려보라고 하니 들들들들 실이 박힌다. “그래 나 참 잘했지?” 칭찬을 기대하면서 아내를 쳐다보니, 별 반응 없이 주변에 흩어진 것들 치우라는 지시만 내린다. 조금 서운했지만 나 할 바를 다했다는 자부심을 안고 조용히 순응한다.

 

#2

컴퓨터가 먹통이 되면 난감해 진다. 내부를 들여다봐도 그저 손톱만한 조각들만 무수히 박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라고는 그저 헐겁게 끼워진 것은 아닌지 손톱으로 꾹꾹 눌러보는 것 뿐이다.

 

나는 컴퓨터가 지시한대로 입력하고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나머지는 지들이 다 알아서 한다. 업데이트도 때가 되면 하라고 하고 안 하면 할 때까지 계속 내 앞에 떠서 재촉하니 성가셔서 결국 하게 된다.

 

내돈 주고 산 컴퓨터가 주인이고 나는 종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시키는 대로 하고나서 처분만 기다리고, 밥 주면 밥 먹고 가끔씩 고기 주면 좋아하고, 품삯 계산하는 방법은 모르는 종.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인 말만 잘 들으면 편하다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주인이 내가 뭘 원하는지 더 잘 알고 좋아하는 먹이도 골라 준다.

 

언젠가 어린 소녀가 드럼 신나게 치는 모습이 신기해서 몇 번 봤더니 그 다음부터 컴퓨터만 켜면 온통 드럼치는 여자들만 나와서 질린 적도 있었다.

 

‘알고리즘’ 이라 하던가? 내가 원하는 것 맞춰서 대령하는 것. 빨리 정신 차리고 머리 흔들지 않으면 악기는 드럼 밖에 없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죽자사자 따라 다니는 추종자들도 이놈이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3

양반 상놈 나눔이 없어지고 이제 세상 비교적 평등해 졌다고 좋아하는 사이 더 엄청난 힘을 가진 자가 나를 조종하는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내 눈에 보이는 주먹으로 나를 겁박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옥죄어 오는 자.

 

온갖 편리함과 풍요함으로 유인해서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나는 과정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고 거저 주는 결과에 만족하며 사는 것.

 

이 세상이 이미 매트릭스 영화처럼 컴퓨터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가상 세계가 아닌가 라는 황당한 생각마저 든다.

 

머리 다시 한번 흔들고 뜰에 서서 겨울 찬 공기를 마셔본다. 가슴속이 시원해 진다. 설마 이것은 가상 세계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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