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일상

나 보다 낫다

Chris Jeon 2022. 3. 17. 17:58

 

 

나는 길치다. 한번 갔던 길도 잘 기억 못하지만 방향 감각도 무디다. 식당 화장실 가서 나 올 때는 반대편으로 꺾어 나와서, ‘employee only’ 붙여진 주방문을 열어 안에서 일하시던 종업원들 놀라게 한 적이 여러 번이다.

 

개소리, 개 같은 자, 개망신, 개죽음, 개고생…

 

나쁜 의미 단어 앞에 ‘개’가 들어간다. 좀 의아하다. 내 생각에는 개가 인간 보다 나은 점도 많다. 최소한 길 찾는 능력만큼은 나보다 좋았다.

 

18년 동안 내 품에서 꼼지락거렸던 녀석과 동네 산책 갔다.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곳이라 한 두 번 갔던 동네 길이다. 촘촘히 들어선 집 사이로 샛길이 있었고 그 길이 목적지 공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내가 앞장서고 녀석은 옆에서 조신하게 따라온다. 샛길 가까이 오긴 왔는데 그 집이 그 집인 것 같아 찾기가 어렵다. 몇 번 기웃대다가 떠오른 아이디어. “네가 앞장서라”, “No problem” 시원한 대답과 함께 한치의 망설임 없이 녀석은 바로 샛길을 찾아 나를 끌고 갔다.

 

‘공자는 거지와 함께 길을 걸어도 거지로부터 배우나, 거지는 공자와 함께 가도 배우지 못한다.’ 조상님과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개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배신하지 않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 조건 달지 않는 것, 솔직한 것, 욕심 부리지 않고…

 

딸이 아빠 생각해서 녀석 초상화 한 장 그려줬다. 99% 닮았다. 18X6=108. 인간 나이 100살이 넘도록 내 품을 떠나지 않았고 나 역시 24시간 녀석 냄새 맡고 살았다. 녀석이 저 위에서 나를 보면 “아빤 꼭 개 같았어.” 라고 할 것 같다. “예쁜 놈, 네 말이 맞다.”

'단상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문화 충격 2: 반말  (0) 2022.03.26
작은 문화 충격 1: 남녀 60세 부동석  (0) 2022.03.23
닥쳐봐야...  (0) 2022.03.05
나 혼자라는 것을 느낄 때  (0) 2022.02.20
낙서 8: 까치 설날  (0) 202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