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글쓰기

묵은지

Chris Jeon 2021. 11. 9. 02:37

 

 

고등어와 묵은지를 듬뿍 넣어 자글자글 끓여낸 고등어 찌게는 겨울철 별미다. 이 맛은 6개월 이상 저온에서 숙성 시킨 김치가 내는 맛이다.

 

글도 숙성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번득이는 영감에 의해 일필휘지로 작성된 좋은 글도 있겠지만 나의 능력으로는 언감생심이다.

 

한참 고민하여 쓴 글이라도 다시 보면 풋내가 난다. 오자 탈자는 기본이고 문장의 연결도 어색하다. 심한 경우 내가 봐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호할 경우도 있다.

 

생각도 바뀐다. 가슴이 뜨거워서 썼지만 며칠 지난 후 보면 내 주장이 너무 과했다는 느낌도 든다. 독선과 아집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글을 저장하는 파일을 둘로 갈라서 ‘숙성방’ 파일을 따로 만들었다. 쓴 글은 일단 그 방에 넣어두고 틈나는 대로 되새겨 본다.

 

내용을 다시 음미하고 다듬을 부분은 다듬는다. 이것은 아니다 싶으면 버린다. 내 글이 숙성방에서 익어간다.

 

블로그 활동 시작한지 석달이 조금 덜됐다. 그사이 게시한 글이 100여편이 넘었지만 아직 많은 수가 아니기에 가끔씩 이전에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볼 때가 있다.

 

대부분 숙성방을 거쳐서 온 것이지만 여전히 아린 맛이 나는 것을 발견한다. 꺼내서 숙성방에 다시 집어넣는다.

 

초심을 유지하면서 게을러지지 않으면 나도 언젠가 1000여편이 넘는 글을 가질 것이다. 그때쯤이면 나는 옛 글을 되새길 여유가 없어질 것 같다.

 

서랍속에 개어 포개 논 옷 중 제일 아래 놓인 옷은 1년이 넘도록 그대로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쩌다 눈에 띄어 잘 손질해서 입으면 몸에 착 달라붙어 편하다.

 

어설픈 글이 그대로 자리잡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좋은 글이 옛 것이어서 관심 밖에 잊혀진 채 있는 것도 아쉽다. 그래서 블벗님의 집을 처음 방문 할 때 처음 글부터 최근 글 순으로 읽는 습관이 있다.

 

블로그에서 글의 게시 순서를 수시로 바꿀 수 있는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반추하고 싶은 글은 다시 앞으로 내서 햇볕에 말리고 손실해서 보고 싶다. 하지만 그런 기능이 없는 것 같아서 대신 카테고리를 더 세분화했다.

 

새 김치도 맛있지만 묵은지의 특별한 맛은 다르다. 나는 풋내나는 새 김치보다 묵은지의 깊고 은근한 맛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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