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소통

아니되옵니다

Chris Jeon 2021. 10. 29. 09:11

 

“아니되옵니다.” 만인지상(萬人之上) 임금님이 가장 스트레스 받았던 말이다. 조선시대 왕의 잘못에 대한 간쟁, 논박을 담당하던 국가기관, 사간원(司諫院) 이야기다. 서슬이 시퍼렇던 연산군 앞에서도 바른말을 해대던 관리들이 일하던 기관이었다.

 

안가 폐지를 약속했던 대통령 후보자가 막상 당선돼서는 슬그머니 그 약속을 없었던 것으로 한 경우가 있었다. 막상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보니 외부와의 사적인 통로 역할을 하는 ‘안가가 필요하더라’는 것이 그 이유다.

 

청와대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감옥이 된다는 말이 있다. 한점의 허점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경호 특성상 모든 외부로부터의 유입이 철저히 걸러지는 시스템으로 생겨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은 고립되고, 더 큰 문제는 통상 집권 말기쯤 주변이 인의 장막으로 둘러쳐질 경우에는 대통령은 영락없이 진열장속 인형의 신세가 될 수 있다.

 

옛 시스템을 무조건 낡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어리석다.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실제적으로 보좌하는 참모진은 비서실이다. 실장을 위시해서 ‘~수석”의 호칭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이고 대통령은 이들의 조언을 주로 듣고 의사 결정을 내린다.

 

한가지 상상을 해 본다. ‘쓴소리 수석’직을 신설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역할은 항상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두가 용비어천가를 부를 때 “아니되옵니다”로 시작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임무다.

 

그의 말이 맞고 틀리고는 상관이 없다. 일단 ‘아니되옵니다 수석’의 존재를 인식하는 이상, 대통령을 포함한 다른 참모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 전에 그의 눈치를 보게 되고, 그가 성가시어서라도 의사결정안을 만들기전에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것이다. 국민 역시 대통령이 입에 발린 단소리만 듣고 있지 않다는 믿음도 가질 것이고.

 

 

냉철한 머리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던 나라의 지도자가 말년에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혹자는 치매라고 원색적인 공격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의 장막’이 주 원인인 것 같다. 이왕이면 조선시대 사간원 관리가 입던 의복을 근무복으로 입은 ‘쓴소리 수석’이, 모두가 ‘지당한 말씀’ 이라고 고개를 조아릴 때, “아니되옵니다”를 소리 높여 외치는 속 시원한 광경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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