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에 걸맞은 모습이나 속성이 있다는 의미다.
캐나다는 일반적으로 동토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다. 땅이 넓으니 온난한 곳도 사실 많지만 대부분 흰 눈을 머리에 인 쭉쭉 뻗은 침엽수 위로 오로라가 번쩍이는 모습을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이곳도 피할 수 없는지 내가 사는 곳도 점점 덜 추워진다고 한다. 살갗이 따끔거리는 추위를 수년 사이 자주 겪어보지 못한 것 같다.
오늘 드디어 이 땅의 이미지에 걸맞은 눈 폭풍이 왔다. 마른 눈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리고 꽁꽁 언 땅위에는 사람도 차도 잘 안보이는 좀 삭막하다고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전개되는 것, 겨울철 동토의 나라다운 모습. 일하러 나가라면 싫을 날씨지만, 등 따시고 배부른 자는 오랜만에 내가 사는 나라다운 풍경에 몸을 맡기고 싶어 길을 나섰다. 한동안 영하 30도가 잦았던 혹한 속에 살았던 곳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던 것 같기도 하다.
비록 동네길이지만 연중 쇼핑을 가장 많이 하는 Boxing Day임에도 불구하고 길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이런 날씨에 혼자 걸어 다니는 사람을 집안에서 유심히 보고 있을 심심한 노인들이 여차하면 911에 신고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속옷을 제외하면 패딩 점퍼에 방풍 자켓 한 벌 걸쳤지만 털모자에 목 두건, 장갑으로 무장하니 무지 춥다는 느낌은 안 들었고 그저 견딜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숲이 우거진 곳으로 갈걸 하는 오만한 마음마저 들었다.
해는 가려져서 어둑어둑한데 사방으로 흩날리던 가루눈이 땅바닥에 닿자 바람에 파문이 이는 듯한 무늬를 만들며 쓸려간다. 동네길이라 집들이 있어 완전히 나 혼자라는 느낌은 적었지만 오랜만에 ‘겨울 나그네’ 음악이 생각나는 경치를 즐겼다.
두시간 정도의 walking을 마치고 따뜻한 집안에 들어와서 커피 한잔 마시니, 한적한 곳에서 살다가 사람들과 많이 부대끼는 곳으로 와서 편하고 심심하지 않게 지내는 재미는 있지만 반면에 ‘나 답게’ 사는 것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무엇이 ‘나 다운’ 것’인지는 당장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사나운 날씨 덕분에 어떻게 하면 남은 여정을 나 답게 걸어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본 하루였다. 그러나 행여 안락함에 지겨워진 시니어의 심심함이 만들어낸 사치스런 생각일 수도 있겠다 싶은 우려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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