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얼룩말이 불러온 현충일 단상

Chris Jeon 2023. 5. 29. 08:06

로댕작 칼레의 시민.

 

 

얼굴말의 얼룩무늬는 왜 생겼을까? 몇몇 진화론적 가설 중 하나는, 얼굴말을 노리는 포식자를 헷갈리게 만들 목적이라고 한다.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할 때 한 녀석을 콕 찍어서 추격해야 하는데 얼룩말들이 무리 지어 모여 달리면 그 얼룩 무늬 때문에 헷갈려서 특정했던 녀석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모여서 살아가도록 진화된 것이다.

 

얼룩말이 무리 지어 달아날 때 중심에 서는 말과 그 외곽에 서는 말들이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무리 외부에 있는 말들이 포식자에게 잡힐 가능성이 크다. 그럼 내부에 서는 말과 그들을 둘러싸고 무리 밖에서 달리는 말은 어떻게 결정될까? 직접 얼룩말에게 물어 볼 수는 없으므로 인간의 관점에서 상상해 본다.

 

가능성 중 하나는, 힘이 센 녀석들이 비교적 안전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힘 없는 개체들이 밖으로 밀려나는 것. 힘의 논리에 의해 집단이 유지되므로 진정한 유대감이란 없을 것 같다.

 

다른 가능성은, 힘세고 싱싱한 말들이 자발적으로 외곽에 서서 약한 동료와 어린 말들을 지키는 것. 이런 경우 진정한 리더십과 일체감이 무리내에서 형성될 수 있을 것 같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의 지도층 혹은 상류층이 사회적 위치에 걸 맞는 모범을 보이는 행위, 특히 사회 리더층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을 말할 때 자주 사용된다. 당시 거의 노예와 다름없는 신분을 가졌던 하층 계급이 그나마 상류층에 존경심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유사시 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분들이니까.

   

임진강변에 ‘화석정’ 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나라에 전쟁이 나면 국사를 논하며 열변을 토하던 문신들은 모두 달아나고, 천대 받던 상민과 중들이 떨쳐 일어나는 나라가 있었다.

 

6월6일 현충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殉國先烈)과 전몰(戰歿)한 장병들의 충렬을 기리고 그 얼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정된 대한민국의 중요한 기념일이다. 한국에서 살 때 현충일에 대한 기억은 조기 단 것 그리고 관공서나 단체에서 기념식 한 것 정도가 전부다.

 

캐나다로 이민 와서 보니 한국의 현충일에 해당되는 11월 11일 Remembrance Day 한달 전부터 대부분 국민들이 가슴에 Poppy를 달아 추념하고 모금도 한다. 당일 도시마다 추념행사를 연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전사한 장병이나 나라를 위해 일하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예우가 각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운구차가 지나가면 주변의 시민들이 고개 숙여 조의를 표하고 참전 용사에 대한 예우가 각별하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 목숨” 이라고 답하면 이기적이라고 흉볼 사람 있을 것이다. 그럼 무엇이 내 목숨 내놓는 것 보다 더 큰 희생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되물으면 어떤 답을 내 놓을 수 있을까?

 

나라 위해 싸웠고 때론 몸 상하고 목숨까지 바친 분들에 대한 진정성 깃든 예우가 부족하다. 전쟁통에 다쳐서 돌아온 분들이 장애인 정도로만 치부되고, 데모하는 와중에 군인들이 매맞고, 국민안전 지키다가 다치거나 돌아가신 분들은 곧 잊혀지고, 군대는 힘 없는 자들만 가는 곳으로 생각되는 나라가 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진정 목숨 바쳐 그 나라 지킬 생각이 들까?

 

전쟁 나면 아름다운 정자 태워 불 밝혀 도망갈 길만 찾았던 왕이 전사자들 모인 곳에 와서 추도하고 나라 곳곳에 조기 다는 것만으로 백성들로부터 존경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국민 역시 하나뿐인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하고 실제 한 목숨 바친 분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예우하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국민을 지켜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우리는 얼룩말이다. 주변에서 노리는 포식자들이 참 많다. 모여서 힘을 합해야 살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힘 있는 말들이 평소 더 싱싱한 풀을 뜯더라도 사나운 포식자가 무리를 노릴 때 기꺼이 외곽에 서서 몸으로 막아내면 계속 리더의 위치를 인정받고 존경 받을 수 있는 명분을 가진다.

 

힘 없고 약한 말도 평소에는 힘센 말들이 힘 자랑 하는 듯한 모습만 보지 말고 유사시 그들이 하는 역할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전체 얼룩말이 살수 있다.

 

현충일을 하루 조기 달고 묵념하는 행사의 날로만 생각한다면  뭔가 부족하고 아쉬울 것 같아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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