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낙서

낙서 18 : 피해자라는 것

Chris Jeon 2022. 6. 28. 04:40

장애인 돌보는 일 하시는 분은 ‘장애인’과 ‘정상인’이란 구분 대신 ‘장애인’과 ‘잠재적 장애인’으로 구분한다고 한다. 지금 정상인이라도 언제 어디서든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후회와 반성’ 글을 쓰면서 ‘피해자’란 단어를 사용했다. 후회할 일을 저지른 사람도 일종의 피해자란 생각이 들어서 사용한 것인데 뭔가 덜 생각한 듯 찜찜하다.

 

A란 가공의 인물을 설정한다. A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어느 날 아내와 심하게 말다툼한 후 출근해서 스트레스 좀 받다가 퇴근길에 마음이 허해서 단골집에서 혼술 하다가 우연히 동료 여사원 만나 합석해서 같이 술 마셨다. 그 여자 역시 혼술할 사정이 있었겠지. 의기 투합하여 과음하게 되고 어쩌다 보니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 이것이 사달이 나서 간통죄 운운하게 되고 직장에서 잘리고, 아내와는 별거. 이후 A는 순간의 실수를 자책하며 술로 지샌다.

 

A를 이지경으로 만든 것은, ‘자신의 나약한 의지’ ‘순간 너그럽지 못했던 아내’ ‘가중된 직장 스트레스’ ‘이성을 잃게 한 술’ ‘그 순간 절묘하게 등장한 여자 동료’ ‘마음이 허했던 얄궂은 상황’ 이다.

 

이러한 이유를 핑계거리로 만들자는 의도는 아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본인이 감당하는 것 맞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가지 불행한 이유들이 겹쳐서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이 생길 수 있다. 마치 멀쩡했던 사람이 운 나쁘게 사고 당해서 장애인이 되는 것처럼.

 

A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보통 사람인 그가 피하기 어려운 고약한 이유들로 인해서 사고를 당한 경우와 비슷하다.  그래서 A라는 사람과 그가 저지른 잘못은 구분되어야 한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지되 그 잘못으로 인해서 그가 계속 죄인으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장애를 당한 사람이 사고 책임까지 지고 살아야 하는 죄인이 아니듯 말이다.

 

A가 계속 죄인이라는 의식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그의 후회는 점점 깊어지고, 계속 술로 그 아픔을 마비시킬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건강을 해쳐 폐인이 되거나 음주운전이라는 또 다른 후회거리를 만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A가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본인으로 인해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자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자신에게 진실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용서하지 않는 상대가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 잘못은 내가 빌지만 용서하는 것은 상대이니 내가 잘못을 빈 것 만으로 내가 할 바는 했다. 이제 짊어진 짐을 벗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 피해는 한 번으로 족하다. 어차피 벌거벗고 나왔으니 이제 다시 옷을 한 번 더 구해 입는다는 생각으로 나서면 이 넓은 땅에서 설마 옷 한 벌 다시 구할 기회가 없겠는가? 패자 부활전이 없는 인생은 너무 가혹하다.

'단상 >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서 20: 싫다는 자 도와주는 것  (0) 2022.08.20
낙서 19: 뇌는 그대로다  (0) 2022.08.04
낙서 17 : 내가 당선인이라면  (0) 2022.06.09
낙서16: Amendo  (0) 2022.05.31
낙서 15: 만화방창萬化方暢  (0) 2022.04.14